참가후기

김재윤 (Canisius High School 2005년 졸업, Univ. of Illinois at Urbana-Champa…

작성자 KEF
작성일 18-01-16 14:30 | 조회 12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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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준 가장 큰 메시지는 과거의 자신보다 월등해지는 것에 있다."

김재윤(Canisius High School 2005년 졸업, Univ.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입학,Columbia University, M.A. 졸업)-現 삼성전자 인재개발원 근무

 

Prologue: Caterpillar to Butterfly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현재 나에게 펼쳐진 길은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며, 지금 생각해 보면 멋쩍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지금 서른 살이 된 나를 보며 시간이 이리 빨리 지나갔는지도 믿을 수가 없다. 머리 속에 물음표만 가득한 10대 소년이 30대 직장인이 된 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다. 어렸을 적의 나는 성인이 되면 닥쳐올 막연한 숙제들을 엄청난 중압감이라 생각했고 이에 대한 소화 능력 또한 크게 부재했다. 어린 아이였던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보겠다는 야망 또한 없었고, 자신감도 크게 없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고 생각했으며 누군가에게 영향력 또한 주고 싶다는 생각 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은 단지 ‘평범’했다.1부: 교환학생 시절의 씨앗 (2002) : “Sowing the Seed of Hope”나는 수학을 참 못했고 지금도 그리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 무슨 과목이 제일 싫은지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수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난 이과생이 아니다. 2002년 영동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나는 무엇을 내가 잘하는지 잘 몰랐고, 어떠한 과목에서도 월등한 점수 또한 보이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몰입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 것은 바로 ‘영어’였다. 부모님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나에게 글로벌화Globaliza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매년 여름방학마다 3주 영어캠프를 보내주시곤 했었다. 그 이유에서인지 나는 한국보다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이미 매료되었으며, 미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뭔가 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품었던 것은 사실이다. 초등학교 이후 영어학원을 계속 다니며 영어의 매력에 난 푹 빠져 있었다.

2002년 여름,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기회를 주시기로 하셨다. Nacel Open Door와의 첫 만남을 17살의 어린 나이에 하게 된 것이다. 그 기회는 바로 미국 남부 지방인 South Carolina에서 Blue Ridge High School이란 공립학교를 1년동안 교환학생으로 다녀오는 기회였다. 영어 문법도 잘 모르던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2002년부터 1년간 교환학생 경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 남부 특유의 성향을 지닌 어느 사냥을 좋아하는 부부의 집에서 민박Homestay을 하게 되었다. 어느 독일인 교환학생도 같은 프로그램을 참여하여 한 집에 같이 살았는데 그 친구는 영어도 잘하여 주위에 항상 학교 친구들이 많았다. 사실 어린 나이에 열등감이 많이 느꼈던 시기이기도 하다. 독일이란 선진국에 대해 궁금한 친구들이 많았으나, 아직 인지도가 높지 않은 한국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는 중국인 1명과 내가 모든 교내 모든 동양인이었다.나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 보다, 한 번 바꿔볼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한국이란 이미지 개선도 중요하지만 영어 실력을 향상 시켜서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내 목표였다. 나는 당시 ‘프렌즈’라는 미국 드라마를 통해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일상 생활의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이 미국 드라마는 나에게 적격이었다. 언어는 결국 반복의 연속으로 구성된 창조물이었으며, 반복 학습을 통한 습득은 오직 내 것으로 되는 일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영어의 역량은 가속화되기 시작했으며 매번 3단계를 거쳐 내 것으로 만들어졌다. 그 3단계는 1) 영어 자막을 켜고 시청, 2) 자막 없이 시청, 3) 대사를 외워 주위 사람들에게 실습이었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단순한 공식을 통해 나는 그 드라마에서 나오는 표현을 한 번이라도 쓰기 위해 배우들이 했던 똑같은 상황을 연출해서라도 표현을 썼었다. 할말을 까먹었다는 표현을 꼭 써보기 위해 말하다가도 중간에 까먹은 척을 하며 “I’ve lost my train of thought”을 연습해 보았으며, 저 한 줄의 말을 조금이라도 빨리 혀에 익숙하게 하기 위해 모든 문장을 20번 이상 빨리 말하는 습관을 들였다. 기똥찬 표현이면 버스를 기다리다가도 중얼중얼 반복했으며, 말하다가 혀가 꼬여버리면 다시 오기로 완벽한 문장을 말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심하게 집착할 정도로 ‘반복’이라는 과정을 수행했으며, 여러 문장들이 내 것으로 될 때마다 기뻐했다. 학교 성적은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B 이상만 유지하면 난 만족했고, 어차피 교환학생은 경험이 중요하다고 이미 생각했었다. 난 내 발음들이 바뀌어가는 것을 보며 신기해했고, 감정을 표현하더라도 수 십개의 단어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너무 놀라워 그 다음에는 영어 단어를 파기 시작했다. 훗날 이 영어 단어들은 내가 영어 강의를 진행하거나 문장을 더욱 고급화시킬 때 큰 밑거름이 되었다. South Carolina에서는 친구들이 없었고 외로운 나날들의 연속이었지만, 내가 이 글로벌 시대에서 영어를 조금 더 고급적으로, 차별화하여 구사하겠다는 신념의 밑바탕이 그려진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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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작성된 영어단어 모음집을 난 지금도 보관하여 보고 있으며 기억을 되짚어보곤 한다.)
2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다(2003-2005) : “A Life-long Change”
South Carolina에서 1년을 무사히 잘 마치고 나는 뉴욕의 Buffalo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Nacel 크리스찬 사립유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Canisius High School 에 입학하여 대학을 꿈꿔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이 학교는 남학교이며 넥타이까지 하고 수업을 들어야 하는 나름 역사와 전통을 가진 사립학교였다. Buffalo에서도 역시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으며 이 곳에서 나는 내 인생을 바꿔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나에게 배정된 미국 가족은 철학과 대학 교수인 아저씨와 상담지도사인 아주머니였다. 하늘이 도왔는지 고급적인 영어밖에 구사할 줄 모르는 이 분들과 함께 나의 영어 역량을 점점 시너지 효과가 나기 시작했다. 매번 저녁식사의 자리는 주제가 깊은 토론의 장으로 이루어졌고, 그 가족들은 나의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기꺼이 모든 주제를 가지고 내 문장을 여러 각도로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의 경쟁자는 더 이상 내 주위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아니었으며 관심 또한 없었다. 내가 과거로부터 더 나아가 발전을 꾀하는 것이 인생의 큰 희열이었던 것이다. 나는 글로벌 시대에서 언어의 역할은 정보 교환 이상이라고 생각했으며 미묘한 교감의 장(場)을 여는 촉매제라고 믿었었다. 이 가족들과의 생활은 나의 관심사인 영어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으며 훗날 OPI(Oral Proficiency Interview) 영어 말하기 평가에서 최상급 Superior보다 한 단계 낮은 AHAdvanced High를 받는데 큰 일조를 하게 되었다.

나는 좋은 사람들이 내 곁에 찾아와 주어서 나를 변화시킨 것에 모든 경의를 표하고 싶다. 적재적시(適材適時)에 좋은 사람들을 만날 때 내가 가꾸어온 열정과 경험은 배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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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춘기 시절 좋은 영향력으로 가득 채워준 Michael & Ann Beckley-Forest 가족이다. 지금도 종종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공부 또한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현실적으로 이제는 대학을 목표하는 시점이라, 공부에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11학년의 성적은 좋지 못하였지만 상향 곡선을 점차적으로 그리기 시작했으며 12학년이 되어서야 교내 Honors List에도 이름을 종종 올리곤 했었다. 미국은 표절Plagiarism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여 문장을 7단어 이상 베꼈다는 이유로 11학년에 영어 과목을 F를 받기도 하였으나, 12학년이 되어서는 나아지기 시작했다. 한 가지 얘기하자면, 12학년 영어 선생님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Joey, 너가 에세이에 무엇을 써와도 그게 답인 것을 너 스스로 증명한다면 난 A를 줄 것이다.” 안타깝게도 정해진 답을 통한 주입식 교육의 희생양인 내가 답을 ‘스스로’ 만들어 ‘증명’하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난 결국 답은 나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답을 증명해내자 거짓말같이 A를 받게 된 것이다. 중간으로 시작하여 장족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 90점에서 95점으로 올린 사람보다 더 값진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난 삶에서 GPA, SAT점수 등 숫자에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고등학교 4년 동안의 노력의 결실의 척도인 것은 맞으나, 세상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값진 경험들이 많기 때문이다. 난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으며,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성실성으로 승부하여 나만의 발전을 꾀하려 했다. 다시 말하지만,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수학에서 95점이나 영어에서 94점의 만족보다 “본인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과거를 바꾸려는 의지에서 나오는 경험”이다. 나는 Varsity Swimming Team에서 활동하며 유일한 동양인으로 그들만의 팀워크와 존중, 배려를 느끼게 됬으며, Jazz Saxophone Band의 테너 색소포니스트로 활동하며 내 Solo Part를 받아내어 밤늦게까지 연습하여 전교생 앞에서 들려주었던 기쁨도 경험하였으며, 나를 처음에 썩 좋아하지 않았던 선생님이 졸업 시점에는 “He is one of the most conscientious students I’ve ever known”이라는 칭찬을 해주는 뿌듯함도 느꼈다. 

“네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날은 성공한 날이 아니라 비탄과 절망 속에서 생과 한 번 부딪쳐 보겠다는 느낌이 솟아오른 때다” -플로베르-
생각 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무서운 말이 있다. 기존의 나를 탈피하여 바꿀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었던 삶은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 야망도 꿈도 없었던 내가 화려한 걸 꿈꿔보지도 않고 단순히 영어를 공부하여 글로벌화에 걸 맞는 인재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로 매 순간을 매진해 왔었다.

3부: 걷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빛이 보인다.
2005년 가을 나는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 진학하여 정치학Political Science을 공부하고 2010년 졸업을 하였다. 졸업 직 후, 조직의 주축을 이루는 인사Human Resources분야에 대해 공부해 보고자 2010년 겨울 Columbia University에 진학하여 조직심리학Organizational Psychology를 공부하고 2012년 여름에 졸업하였다. 대학생활 1학년 때에는 약사가 되어보겠다고 생각을 잠시 했었는데, 여러 사람들의 조언도 듣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을 더 해보니 기업 쪽에서 먼저 조직 경험을 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생활은 언제가 나에게 피와 살이 될 것으로 생각되며, 나를 더욱 다양한 각도로 지식의 살을 찌울 것이다. 나에게도 행여나 ‘잘못 선택한 길이 있을까?’ 라고 자문(自問)한다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후회하는 시간보다 얻은 경험이 더 값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삼성전자 인재개발원의 리더십개발그룹에서 일하고 있다. 40살 즈음 되어 꼭 해보고 싶은 일을 지금 경험하고 있어 나는 현재 매우 감사한 삶을 살고 있다. 하늘은 나에게 거짓말 같이 좋은 기회들을 많이 주어 현재의 나를 다듬어 주었다. 내가 원하는 영어 강의를 원없이 하고 있으며 매번 발전하기 위해 Ted Talk 등의 노하우가 담긴 책과 동영상을 보며 훌륭한 강연자로 거듭날 꿈을 가지고 있다. 부모님께서는 글로벌 시대에 맞추어 선견지명을 통해 나를 어린 나이에 맞는 선택을 하게 해 주셨고, 그 혜안은 실로 놀랍다.

Epilogue: Butterfly in the Sky
대한민국 5천만명의 국민에게는 5천만개의 장점이 있다. 나에게는 나만의 장점이 있다고 믿고 싶다. 그 것은 바로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포함된 영어이다. 영어에서만큼 밀리고 싶지 않으며, 지금도 이 욕심은 하늘을 찌른다. 영어는 내 자존심이며 지금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영어 강의 또한 내 자존심이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월등해지는 순간 비로소 사람은 본인만의 성장을 꾀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탈환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여러분들만의 멋진 삶을 응원하며 마무리한다. Bravo, your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