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윤 (Canisius High School 2005년 졸업, Univ. of Illinois at Urbana-Cham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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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준 가장 큰 메시지는 과거의 자신보다 월등해지는 것에 있다."
김재윤(Canisius High School 2005년 졸업, Univ.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입학,Columbia University, M.A. 졸업)-現 삼성전자 인재개발원 근무
Prologue: Caterpillar to Butterfly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현재 나에게 펼쳐진 길은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며, 지금 생각해 보면 멋쩍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지금 서른 살이 된 나를 보며 시간이 이리 빨리 지나갔는지도 믿을 수가 없다. 머리 속에 물음표만 가득한 10대 소년이 30대 직장인이 된 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다. 어렸을 적의 나는 성인이 되면 닥쳐올 막연한 숙제들을 엄청난 중압감이라 생각했고 이에 대한 소화 능력 또한 크게 부재했다. 어린 아이였던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보겠다는 야망 또한 없었고, 자신감도 크게 없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고 생각했으며 누군가에게 영향력 또한 주고 싶다는 생각 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은 단지 ‘평범’했다.1부: 교환학생 시절의 씨앗 (2002) : “Sowing the Seed of Hope”나는 수학을 참 못했고 지금도 그리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 무슨 과목이 제일 싫은지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수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난 이과생이 아니다. 2002년 영동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나는 무엇을 내가 잘하는지 잘 몰랐고, 어떠한 과목에서도 월등한 점수 또한 보이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몰입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 것은 바로 ‘영어’였다. 부모님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나에게 글로벌화Globaliza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매년 여름방학마다 3주 영어캠프를 보내주시곤 했었다. 그 이유에서인지 나는 한국보다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이미 매료되었으며, 미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뭔가 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품었던 것은 사실이다. 초등학교 이후 영어학원을 계속 다니며 영어의 매력에 난 푹 빠져 있었다.
2002년 여름,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기회를 주시기로 하셨다. Nacel Open Door와의 첫 만남을 17살의 어린 나이에 하게 된 것이다. 그 기회는 바로 미국 남부 지방인 South Carolina에서 Blue Ridge High School이란 공립학교를 1년동안 교환학생으로 다녀오는 기회였다. 영어 문법도 잘 모르던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2002년부터 1년간 교환학생 경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 남부 특유의 성향을 지닌 어느 사냥을 좋아하는 부부의 집에서 민박Homestay을 하게 되었다. 어느 독일인 교환학생도 같은 프로그램을 참여하여 한 집에 같이 살았는데 그 친구는 영어도 잘하여 주위에 항상 학교 친구들이 많았다. 사실 어린 나이에 열등감이 많이 느꼈던 시기이기도 하다. 독일이란 선진국에 대해 궁금한 친구들이 많았으나, 아직 인지도가 높지 않은 한국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는 중국인 1명과 내가 모든 교내 모든 동양인이었다.나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 보다, 한 번 바꿔볼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한국이란 이미지 개선도 중요하지만 영어 실력을 향상 시켜서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내 목표였다. 나는 당시 ‘프렌즈’라는 미국 드라마를 통해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일상 생활의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이 미국 드라마는 나에게 적격이었다. 언어는 결국 반복의 연속으로 구성된 창조물이었으며, 반복 학습을 통한 습득은 오직 내 것으로 되는 일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영어의 역량은 가속화되기 시작했으며 매번 3단계를 거쳐 내 것으로 만들어졌다. 그 3단계는 1) 영어 자막을 켜고 시청, 2) 자막 없이 시청, 3) 대사를 외워 주위 사람들에게 실습이었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단순한 공식을 통해 나는 그 드라마에서 나오는 표현을 한 번이라도 쓰기 위해 배우들이 했던 똑같은 상황을 연출해서라도 표현을 썼었다. 할말을 까먹었다는 표현을 꼭 써보기 위해 말하다가도 중간에 까먹은 척을 하며 “I’ve lost my train of thought”을 연습해 보았으며, 저 한 줄의 말을 조금이라도 빨리 혀에 익숙하게 하기 위해 모든 문장을 20번 이상 빨리 말하는 습관을 들였다. 기똥찬 표현이면 버스를 기다리다가도 중얼중얼 반복했으며, 말하다가 혀가 꼬여버리면 다시 오기로 완벽한 문장을 말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심하게 집착할 정도로 ‘반복’이라는 과정을 수행했으며, 여러 문장들이 내 것으로 될 때마다 기뻐했다. 학교 성적은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B 이상만 유지하면 난 만족했고, 어차피 교환학생은 경험이 중요하다고 이미 생각했었다. 난 내 발음들이 바뀌어가는 것을 보며 신기해했고, 감정을 표현하더라도 수 십개의 단어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너무 놀라워 그 다음에는 영어 단어를 파기 시작했다. 훗날 이 영어 단어들은 내가 영어 강의를 진행하거나 문장을 더욱 고급화시킬 때 큰 밑거름이 되었다. South Carolina에서는 친구들이 없었고 외로운 나날들의 연속이었지만, 내가 이 글로벌 시대에서 영어를 조금 더 고급적으로, 차별화하여 구사하겠다는 신념의 밑바탕이 그려진 소중한 시간이었다.

2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다(2003-2005) : “A Life-long Change”

“네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날은 성공한 날이 아니라 비탄과 절망 속에서 생과 한 번 부딪쳐 보겠다는 느낌이 솟아오른 때다” -플로베르-
3부: 걷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빛이 보인다.
Epilogue: Butterfly in the Sky





